미래는 핀란드에 있다.
HIT : 358 WRITER : 다이애나 홍 DATE : 2008-05-18 21:24:06
'빚지고 못 사는' 핀란드, 1등 국가로 떠오르다


<div style="text-align:center"><a href=http://book.interpark.com/gate/IP3Gateway.
미래는 핀란드에 있다 리처드 D 루이스 지음｜박미준 옮김｜살림｜327쪽｜1만3000원
자기 전에 습관처럼 씹는 자일리톨 껌, 눈 쌓인 자작나무 숲 어딘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산타클로스, 세계적인 휴대폰 브랜드 노키아….

핀란드에 대한 인식이 이쯤에서 머문다면 섭섭한 일이다. '국가 경쟁력 대국'으로 세계가 칭송한 지 오래기 때문이다.

책은 국내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하고 생활 수준이 높은 핀란드의 힘을 보여준다. 그곳에선 누구나 안심하고 수돗물을 마셔도 된다. 버스·기차·비행기는 항상 정시 출발한다. 우유와 커피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의료 서비스 역시 어디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뿐 아니다. 짧은 기간에 통신업계 리더로 변신했고, 2차 대전 패전국 중 유일하게 전쟁 배상금을 전부 갚았다. 전쟁 때문에 무산됐던 올림픽을 12년 뒤인 1952년에 개최함으로써 한번 한 약속을 끝끝내 지킨 나라이기도 하다. 책은 이제껏 우리가 접하기 힘들었던 핀란드의 속살을 보여준다.


저자는 유럽의 저명한 핀란드 전문가다. 그는 900여 년간 스웨덴·러시아의 통치를 번갈아 받은 험난한 역사,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혹독한 겨울 날씨 등 악조건 속에도 핀란드가 어떻게 유럽의 변방에서 선진국으로 거듭 났는지를 이 나라의 문화·민족성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분석했다.

예를 들면, 저자는 단지 1마르카(핀란드의 옛 화폐 단위로, 약 175원)를 갚기 위해 눈으로 뒤덮인 산길을 5㎞나 걸어 내려간 핀란드인을 직접 만난 경험을 통해 '빚 지고는 못 사는' 핀란드인의 국민성을 보여준다.

'내가 저 사람에게 빚진 것은 없나' 자문하곤 하는 핀란드인의 강박 관념은 기업 경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핀란드 기업은 어음을 한 달 안에 지불을 끝내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아무리 작은 부채라도 질색하는 핀란드인의 습관이 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2차 대전 전쟁 배상금을 다 갚게 만든 원동력이라며, 핀란드인의 독특한 가치관과 국제 사회에서의 대처 방식을 연관 지어 설명하고 있다.

책은 다소 생소한 핀란드의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하고 있지만, 가벼운 농담과 에피소드도 적절히 배합해 책장을 넘기기가 어렵지 않다. 특히 핀란드인의 무뚝뚝함에 대한 갖가지 일화가 생생하다.

1939년 이탈리아 대사로 있던 한 핀란드 외교관은 본국으로부터 "이탈리아의 국내 상황을 전하는 연간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관계 때문에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럽던 당시인데도, 그가 제출한 보고서엔 "올해 이탈리아엔 특별한 사건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좀 더 긴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외교관이 다시 고쳐 쓴 보고서는 다음과 같았다. "올해 이탈리아에는 '핀란드가 관심을 가질 만한' 사건 없음."

이웃나라 스웨덴을 방문해 가짓수가 17개나 되는 코스 요리를 대접받은 뒤 칭찬을 기대하며 서있는 스웨덴인 주인에게 "감사합니다. 빵이 맛있더군요"라고 짧고 무뚝뚝하게 답례한 '전형적인' 핀란드인의 이야기도 웃음을 자아낸다.

핀란드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전쟁의 상흔(傷痕)과 경제적 유복함, 문화적 다양성과 겉으로 드러나는 배타성, 허를 찌르는 유머와 북유럽 특유의 비관주의가 함께 하는 '부조화의 매력적인 집합소'로 요약된다.

평소엔 "낯가림이 심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얌전하지만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낮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무모할 만큼 폭음을 즐기는 사람들, '실용주의'를 최고 가치로 내건 수도 헬싱키에서 사어(死語)가 된 지 오래인 라틴어로 진행되는 라디오 방송, 100여년 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서도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스'라는 이름의 밴드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곳…. 이렇게 모순이 가득 찬 나라가 바로 핀란드다.

그러나 저자의 섬세한 손길로 그려진 미묘하고 복잡한 핀란드의 모습은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우리 사회와 닮았기에 흥미를 더한다. 페르티 살롤라이넨 전(前) 주영(駐英) 핀란드 대사는 "핀란드의 영혼을 꿰뚫었다"며 저자의 통찰력을 찬탄했다.




[오윤희 기자 oyounhee@chosun.com]